1. 겁에 질린 아이

어린이들과 작업하는 여러 가지 좋은 점을 꼽아보기는 하지만 매번 생각은 그것을 통해 벗어나고자 했던 어떤 압력과 마주하는 장면으로 결국 되돌아간다. 어린이가 학교 제도를 거치며 카오스적 자질이 제거되는 것에 분노하고,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데 저항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나 역시 성인으로서, 훈육의 대상과 순진무구한 존재라는 모순된 구도 아래 어린이를 거울 이미지로 내면화했던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싶다. 다시 말해 어떤 압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혹은 대항하기 위해 어린이들과의 작업을 해 온 것이라 느끼고 그것을 고백하고 싶어진다.

생각이 자꾸 되돌아가는 시점은 <이룹빠!>를 위한 연구모임을 시작하던 때이다. 어린이들과의 작업은 과거 <플라잉시티> 활동 초기부터 꾸준히 해오기는 하였으나 중심 주제가 된 것은 그렇게 주변의 관심들이 모아지면서부터이다. <플라잉시티>는 작가그룹으로 출발하였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회사의 형태로 운영되었고 <이룹빠!>도 회사의 새로운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내가 그 프로젝트에 더욱 몰두하게 된 것은 어린이에 대해 토론하고 작업을 개발하는 것이 회사 생활의 압력에 커다란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상 나는 주로 압력을 가하는 쪽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피곤해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수행하는 일상의 업무를 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상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상상 속에서 시나리오는 이미 주어져 있고 업무 담당자는 배우처럼 간결한 의사전달, 풍부한 비언어적 수단을 동원하여 목표를 구체화해나가는 명확함, 그리고 돌발상황을 마치 예견되었던 것처럼 처리하는 순발력을 갖추고 있다. 나는 책임자로서 능력 발휘를 위한 여러 가지 조건을 준비해 두었으므로 여기서 어긋나는 것들이 발견되면 마이크로 매니지먼트가 가동된다. 회사의 직원들은 자신의 능력치 각성을 당연시하는 나를 잘 참아주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느 날 업무상의 실수를 지적하는 중에 앞에 서 있는 여직원이 부들부들 떠는 것을 힐끗 보는 순간 문자 그대로 두개골에 가해지는 충격을 느꼈고 할리우드 드라마는 아방가르드 필름으로 바뀌었다. 필름이 찢어지고 긁힌 자국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텅 빈 극장에 홀로 앉아 갑자기 끝나 버린 시퀀스의 마지막 장면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 장면에는 떨고 있는 손과 함께, 교탁-죽순 회초리-가늘게 뜬 눈-떨리는 무릎, 크고 높은 나무-소리의 벽-허공을 나는 귀, 아니 액체 괴물 같은 이미지들이 겹쳐있었다. 나는 여전히 환상 속에서, 환상 이미지들과 쫓고 쫓기는 겁에 질려 있는 어린 아이였다. 나는 겁에 질린 그 아이를 해방시켜야 했다.

그동안 한가지 깨달은 것은 내가 성인으로서 느끼는 그 압력이 어린이에게 성장을 요구하는 압력과 같은 것이라는 점이다. 자기 계발 성장 담론은 자라나는 시기에 특히 강하게 작용한다. 산업노동이 지식노동으로 바뀌어 가면서 튼튼이 이데올로기는 똑똑이 이데올로기로 변화했으며, 과거 어린이가 산업노동에 특히 희생되었던 것처럼 지금은 학습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정보화가 가속화되고 코로나 시기에 강화되면서 비대면 블루스크린적 환경(소셜미디어)을 배경으로 이러한 압력은 '몰입에의 요구'로 진화하고 있는 것 같다. 각성되고 강화된 집중력을 통해 놀라운 성과를 이룰 수 있다는 사회적 환상은 아인슈타인도 두뇌의 10퍼센트 밖에 쓰지 못했으니 계발의 여지는 무궁무진하다는 식으로 선전된다. 무시무시한 압박이다. 아인슈타인조차도 10%밖에 쓰지 못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러한 압력에 휘말려 있다는 것 자체가 어린이 범주의 사회적인 성격을 증명한다. 근대적인 어린이 개념이 자리 잡기 전까지 아이들은 안티 휴먼이나 공포의 존재, 혹은 좋게 보아도 교육에 의해 혼탁함이 제거되어야 하는 존재였으므로 소모품처럼 다루어지거나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신비롭고 순결한 존재, 구원의 화신처럼 반대편 극단의 인식 역시 강한 상징으로 존재해왔다. 즉, 사회의 중추가 잘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예비자원, 혹은 부정성 치유 등 정상인의 양면적인 거울 이미지로서 기능해왔고, 지금도 사회적 무의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이(시기)의 환원 불가능한 고유성이 인식되는 것은 루소, 페스탈로찌를 거쳐 프뢰벨에 이르러서이다.

루소의 어린이 개념에서 주목할 것은 다른 무엇과의 비교를 통해 접근하지 않고 어린이 시기에 절대성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즉, '어린이는 혼자다.' 자기 존재의 중심을 자신 안에 갖고 있기에 행복하다는 관찰이 성장의 필수적인 과정인 제 2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에밀'이 철학 저서인지 교육학 저서인지 모호한(혹은 둘 다인) 것에서 보듯이 루소가 사유의 힘을 빌어 접근했다면, 페스탈로찌는 그가 배제한 아이/엄마 관계를 근본적인 토대로 인정하여 그 고유성에 또 다른 기초를 놓았다. 어린이는 사랑을 통하여 일깨워지는 '신적인 본성'을 간직한 존재로 타락한 성인이 타락하지 않은 어린이를 교육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 사랑인 것이다.

어린이 개념에 뚜렷한 고유성이 부여되는 마지막 단계에 프뢰벨이 있다. 그는 놀이 개념에 주목하면서 위의 실존적인 시각에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보다 분명한 형태를 부여하였다. 자연과학도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던 프뢰벨은 자연철학적 운동과 생성의 이미지를 어린이 교육에 접합시킨다. "어린이의 유희는 기능의 훈련이 아니라 우주의 의미 연관 안으로 안내하여 '전체로서의 생'을 자각하게 한다."

이러한 영감에 가득 찬 자각과는 달리, 현실에서 어린이의 위치는 여러 압력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결정된다. 16세기를 지나며 어린이용 의복이 나타나고, 회화에서 어린이가 그 나름의 특징으로 묘사되기 시작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관찰되는데, 서구의 현실적 역사에서 어린이가 피보호자로서의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은 카톨릭과 신교 사이 주도권 다툼의 결과이다(아리에스). 신구교 다툼의 와중에 구원의 불안에 시달리던 부모들의 호응에 힘입어 경쟁적으로 교육사업이 벌어진 결과, 엉뚱하게 어린이가 교단의 미래를 짊어질 세력으로 떠올랐고, 보호의 대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여기서 가족의 탄생이 등장한다. 어린이가 특별한 존재로 관심의 대상이 되자마자 가족은 순진무구하지만 엄격한 교화를 필요로 하는 존재를 담아내고 보호하는 울타리로서, 어린이에 관한 한 외부 사회에 맞서는 고립된 단위가 된다. 중세시대 가족간의 경계라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혈연관계보다는 사회적, 직업적 관계의 밀도가 훨씬 높았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확립된 (핵)가족 단위는 공동체의 대대적인 축소의 결과이고, 어린이를 중심으로 불가침의 경계를 세움으로써 새로운 세계의 중심 단위가 되었다. 이렇게 배타적으로 영토화된 어린이는 프뢰벨이 발견한 놀이 정신으로 주목받기보다는 순행적으로 사회에 동화될 수 있는, '관리'되는 존재가 된다. 결국 근대적 주체로서 발견된 어린이는 오늘 존재하지 못하고 내일의 존재로 항상 유예되는 상태에서 존재의 역능과 이를 길들이려는 체계 사이의 긴장이 작용하는 장소로 구조화되어 버린다.

행동주의 심리학이 여기에 개입하여 어린이 발달의 문제를 다루게 되는데, 심리학이 인지공학, 뇌과학 등으로 발전하고 있는 지금 분위기는 조금 달라진 듯도 하지만, 실용 지식의 겉모습은 세밀한 통제와 개입을 위해 가족 개념과 은밀히 결합되어 있다. 지금 우리는 외부 요구에 대한 아이의 적절한 반응에는 보상을,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처벌을 준다는 생각을 상식처럼 여긴다. 임용고시의 단골 문제였던 인지발달 이론에서 제시하는 단계들은 얼핏 상식적인 설명 같고 임상적 증거로 지지되기도 한다. 또한 일상생활의 반복적인 규칙 확립이나 과잉행동의 교정에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습관의 중요성, 여기서 유도되는 독립심, 보상과 처벌에 의한 반복훈련 등의 생각들은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적극적 강화'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정식화된 것이며, 나아가서 "행동의 동기뿐만 아니라 욕구까지도 반발없이 통제할 수 있다"(스키너)는 언급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초자아)'이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기서 더 자세히 이야기할 문제는 아니지만, 정신분석/행동주의 심리학, 가족의 탄생/관리사회로의 이행, 초자아/자기강화 등의 쌍을 생각해보면 가족의 탄생이 낳은 극적인 변화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과거에는 '성장', '통제'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는 것으로, 시대적 요구에 의해 '금지'는 '자제'의 형태로 재생산되며, 가족은 무의식 수련의 일차적인 단위가 된 것이다. 대중매체에서 가족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사례들은 가족이 아니었다면 문제시되지도 않았을 거라고 느낄 정도로 가족은 절대의 영역이다. 불편한 것은 발달이론과 같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세트 안에서 이 문제들이 다루어진다는 사실이고, 놀이의 창의성은 가족의 병리학 내부로 빨려 들어가며, 실용 지식은 교묘하게 철학적 규범으로 전이된다. 하나의 일화를 들어 보자.

“여섯 살도 채 안 된 소녀가 코끼리의 날개에 대해서 물어 왔다. 피아제는 코끼리는 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소녀는 “아니야. 코끼리는 날 수 있어. 나도 본 적이 있는데.”라고 주장했다. 그는 농담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어린 소녀는 분명히 어떤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때 현실적인 설명은 소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약 코끼리가 어디로 그렇게 급히 날아가야 했냐고 대화를 계속했거나, 코끼리가 어떤 어려움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냐고 물었더라면 소녀가 씨름하고 있던 문제는 드러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일화에서 긴장을 읽어야 한다. 우선 피아제라는 구심력과 코끼리의 날개라는 원심력 사이의 긴장이 있다. 일차적으로 날개를 가진 코끼리는 금지되지만, 소녀는 저항한다. 그리고 그것은 농담으로, 환상으로 다루어진다. 그리고 피아제가 더 진행했더라면 그가 제 3의 위치에서 질문했을 법한, 그 환상에 씨앗을 제공했을 거라고 추측되는 소녀의 가족과 소녀 사이의 긴장이 있다. 환상이 이 긴장을 뚫고 모순 사이를 주파할지 서로 배타적인 영토들 어디로 좌표가 매겨질지 알 수 없지만 그대로 사라지는 건 결코 아니다. 환상이 생성시킨 어떤 미지의 공간을 다시 좌표화하거나 배제하는 시도는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언론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이를 피해 코끼리가 발톱만 남거나 용이 되어 하늘을 덮더라도, 심지어 분석가가 환상을 받아들여 코끼리가 급했던 이유를 물었더라도 가족관계에서 답을 찾는 한 계속된다.

얼마 전 티비 방송에서 소금을 먹는 아이의 이야기가 소개된 적이 있다(구두 소개). 여기서 분석가의 답은 실용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나는 애초에 소금을 먹는다는 행동이 엉뚱하고 창의적이라 생각했고, 왜 집과 나무 그림을 근거로 처방하는지 의아스러웠다. 소금은 가루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변화할 수 있고, 실제로 녹아 없어지기도 하는 마술을 부린다. 어린이들이 액체 괴물을 왜 좋아하는지 안다면 소금에 동일시되는 심리도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방송 구성의 긴장감을 소금을 많이 먹으면 안된다는 금지 하나에 온통 의지한 채, 식사의 영양성분 분석, 소금 과잉섭취의 해로움이라는 지식, 엄마의 관심 유도 행위라는 분석 등이 합쳐져 아이와 소금 섭취의 규칙을 약속하는 것으로 이어지는데, 금지가 자제의 형태로 재생산된다는 명제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구조이다. 그럼 소금을 그렇게 먹어대는 것을 내버려 두자는 것인가? 소금 먹는 행위가 환상임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어린이의 어린이다움을 존중하는 첫걸음이다. 방송에서 아이는 자는 시간에도 엄마에게 놀아달라고 하는데 소금먹는 행위라고 다르게 생각했겠는가. 아마 예술가가 이 상황에 마주했다면 소금을 가지고 아이와 놀면서 그것이 현실이 아닌 환상임을 깨우쳤을 것이다. 소금으로 실컷 놀아주었다면 놀이의 소재와 음식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워진다. 어차피 아이의 목적은 관심 끌기였으므로 소금이 아닌 다른 무엇이든 동원되었을 것인데 이제 스스로 억제하는 훈련으로 들어갔으니 그것을 억누르다 진짜 병이될 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열정적인 분석가라면 위의 실용적 해결책에서 더 나아가 그것이 금지에서 비롯되었을 거라 보고, 소금 먹는 환상이 가족생활의 어떤 계기에서 비롯되었을까 궁금했을 것 같다. 엄마의 사생활, 그녀의 어린 시절, 엄마의 그 엄마까지 파헤치려고 했을지 모른다. 소금인형이든, 샌드맨 비슷한 소금맨이든 무언가 더욱 기발한 것이 나올 가능성도 차단되었으니 이제 다른 환상을 찾을지 모르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금지에서 비롯된 환상인 셈인데 아이는 정말 겁에 질려 환상의 악순환을 타고 돌지도 모른다. 과잉행동 교정을 통해 어린이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도 (앞의 스키너 발언 맥락대로) 하나의 환상에 기초한 것인 바에야 이미 몰입의 방아쇠는 당겨진 것이 아닌가 불안해진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가족과는 별 상관이 없을 소금이라는 환상의 환상다움을 이해하지 못하고 보호와 금지라는 소실점에 고정된 나머지 가족이라는 가상의 투상도법적 공간에 갇힌다는 점이다. 그렇다. 여기까지 생각을 이어오다 보니 내가 상상했던 영화의 장면들도 환상의 악순환이었음을 깨닫는다. 시나리오를 맹렬히 추종하는 것은 그 실패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일 수 있고, 그러한 악순환은 너무도 강력한 자기장을 만들어 관계된 모든 것들을 가둔다. 겁에 질린 아이를 해방시키는 것은 어린 시절에서 억압의 원인을 찾는 것도, 순진무구한 희생양을 찾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해방된다. 20여 년 어린이들과 작업해 왔는데 이런 지속성은 수동적인 이유로 생겨나는 것이 아닐 것이고, 아이들의 엉뚱함을 발견하며 매번 감탄하고 새로워지는 기분, 신성한 놀이라 불러야 마땅할 이러한 과정이 그 지속성의 핵심에 있다. 어린이의 일상에서 놀이는 최상의 표현과 형태를 얻는다.

2. 몰입이라는 환상, 놀이라는 현실

프뢰벨에 기대어 놀이가 어린이의 고유성이라 전제한다면 정신분석에서와는 다르게 선후관계를 바꾸어 환상이 금지에 선행한다고 보자는 것이 나의 제안이다. 이렇게 보면 굳이 어떤 압력이나 긴장이 없어도 환상은 생성되는 셈인데 호이징하가 놀이의 환원 불가능한 원초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놀이에서도 환상에 몰입하되 중독성을 가지는 것과는 다른 미묘한 경계가 존재한다.

환상(혹은 추상)이 제 역할을 하려면 몰입이 필요하다. 주체는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어야 한다. 마이클 프리드는 미니멀리즘 조각에 대한 비평에서 추상회화를 옹호하면서 몰입을 미학적인 가치로 격상시켰다. 단순한 입방체의 물성을 앞세운 미니멀리즘은 연극적 상황을 만들어 내는 가짜 믿음에 기초하는 반면, 추상회화는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조건에서 고도의 집중을 통해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을 창조하는데, 여기서 형상과 배경의 구분이 사라지고 방향 없는 선들이 가능해지며 진동하는 공간이 태어난다고 한다. 마치 응시하고 있는 회화의 캔버스를 염력으로 떨게 만들기라도 하는듯한 이러한 태도를 몰입이라 불렀고, 비현실이지만 진실로 믿기 때문에 추상의 '리얼리티'라 했다. 카메라의 과격한 줌인, 혹은 히치콕의 트랙아웃/줌인으로 만들어지는 공간감을 상기해도 되겠으나, 차이점은 카메라나 돌리트랙 등 장비 없이 맨 눈과 정신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몰입이다. 일상에서는 고속주행하면서 속도가 오를수록 초점을 맞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상태에서 창밖의 대상들이 납작해지고 공간이 단축되어 보이는 상태에 비견할 만하다. 내 경험으로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에 능한 상사가 프로젝트의 실수를 지적하며 부하직원을 과하게 혼낼 때의 심리도 비슷한 것 같다. 목표에 꽂혀 있는 심리상태에서 계획표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현실이어야 마땅한 일종의 판타지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프리드에 대해서는 당대 미니멀리스트들이 다수 응답하였으나 할 포스터가 '실재의 귀환' 서문에 적은 것을 백미로 꼽을 만하다. 그는 친구 가족과 함께 어느 미니멀리즘 조각 전시장(안토니 카로의 작품이었던 듯하다)에서 대화하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대화 중 친구의 딸은 조각작품 주변에서 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쪽에 있던 아이는 다음 순간 반대편에 나타나고, 대화 중에 그 움직임이 의식되면서 공간이 단축되고 재배치되면서 유동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미니멀리스트들은 프리드가 다소 폄하하는 의미로 붙인 연극성이라는 비평을 정확한 지적이라고 환영하였는데, 포스터는 가상인줄 알면서도 그 상황에 몰입하는 게임을 벌이는 것이 미니멀리즘의 놀이 정신(그의 용어로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귀환, 즉 네오아방가르드)이라 했다.

나는 프리드가 선후관계를 애매하게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화가는 환상을 보았기 때문에 몰입할 수 있다. 몰입에는 환상이 먼저 필요하지만, 놀이는 환상을 생산한다. 예술가의 실제 작업에서 몰입과 놀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놀이를 해야 환상이 나오고 그것을 되풀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몰입하는 것이라고 본다. 칸딘스키가 추상회화를 발견한 상황을 떠올려 보자. 그러면 기왕에 공들여 구축한 환상을 다시 놀잇감으로 다룰 수 있는 작가는 얼마나 될까? 그래서 미니멀리즘이 개념주의 미술로의 길을 열게 된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예술가의 자기부정, 혹은 혁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하튼, 다시 한번, 여기서 가장 앞선 것, 근원적인 것은 놀이다.